쉬엄쉬엄 가도 괜찮아요 / 서정홍 

 

산골 농부 시인 서정홍을 만나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22년 9월 24일 토요일 오후 2시

경남도 교육청이 주최, 창원도서관이 주관하는 '2022년 경남 독서 한마당'

독서진흥 행사의 일환으로 '작가와의 만남'이 개최되었다.

개최된 곳 중 하나인 경남 합천도서관에서,

서정홍 작가와의 만남 '시의 숲에서 길을 찾다'

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자리에 서정홍 시인을 만났다.

나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난 시인이 서정홍 시인이다.

그리고 시를 읽어보기 위하여 처음으로 합천도서관에서 서정홍 시집을 찾게 된 동기이다.

시를 읽는다가 맞는지, 시를 읊는다가 맞는지, 시를 음미한다가 맞는지.

어느 말이 맞는지 모르지만 시에 대해 알아가기로 한 건 이를 통해서이다.

시를 적어 보기도 싶어졌다. 시를 적는다면 작가가 되고 싶다는 건가?

아직은 모른다.

그냥 적어보고 싶다.

읽고 또 읽어보면

시라는 문맥이 답을 주겠지.

그래서 첫 작품으로 '쉬엄쉬엄 가도 괜찮아요'로 시작해 본다.

쉬엄쉬엄 가도 괜찮아요

 

산골 농부 시인이라 그런지 내용이 아리송하다.

말 그대로 시골풍으로 일상생활과 밀접한 내용을 현실감각으로 표현한 듯하다.

그래서 나는 이 시들이 시인지를 모르겠다.

아직 수양이 부족한 탓이겠지요.

 

근데 희한합니다.

나도 시골에서 생활하면서 똑같이 느꼈고, 똑같이 얘기했고, 지나간 일들인데

그 모든 것이 시로써 표현되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합니다.

농촌 생활 그 자체가 시인 걸, 시였던 것을 왜 몰랐을까요?

내년 1월부터 서정홍 시인의 글쓰기 모임에 다니기로 했으니 그 때가서 배워보면 알겠지요.

나도 이제부터라도 쉬엄쉬엄 가면서 시 한수 읊어 볼렵니다.

오늘도 시 한 편으로

아니

시집 한 권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여기는 농촌이라 책방은 찾아보기 힘들고 합천도서관에 가면 모든 책들을 빌려준답니다. 그곳에 없다면 '대차 대출'이라고 경상남도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모든 도서관(경상남도 내에 대략 30여 곳 도서관 있음)에 있는 책들은 다 빌려 볼 수 있답니다. 너무나 편리하고 좋답니다. 

물론 무료입니다.

초롱꽃

정원에 피어 있는 초롱꽃

 

초롱꽃 피어 그 고운 꽃잎 위로 달빛 흐르는 밤엔

나를 기억해 주오

별빛 저어 가는 풀벌레 나래 소리

잎새 끝 맺혀 울고 있는

나를 기억해 주오.

 

저만치 산언덕에 걸쳐있는

달빛 넘쳐나는 풀꽃 향기에 살포시 잠드는 밤

초롱꽃 한 송이

당신에게 바치노니

행여 날 잊었다 마오.

 

이른 새벽 넘어가며

이슬로 남아 몸부림치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앗아가 버리는

아침노을에

부디 나를 기억해 주오.

 

온밤 외로이 지새며

뜨거운 열기조차 견디면서

까만 밤을 환하게 비춰준 이슬방울

나의 여린 눈물인 양

그렇게 기억해 주오.

 

 

 

소심한 복수 : 초등학교 다닐 때 고모할머니댁 아재와의 일어난 일을 적어 보았다.

어린 시절에 고모할머니 가족들과 함께 살았었다.

함께 산지 3년쯤 되었을 무렵 큰아들인 아재는 중학교 2학년이었고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아재는 나와 함께 커가서 그런지 나에게 그냥 형이라 불러라 했다.

형이기도 하고 아재이기도 한 그는 앞으로 전개되는 나의 소심한 복수의 대상이자 복수의 화신이 되었다.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 직전, 제목이 가물거리지만 “누가누가 잘하나” 어린이 노래자랑이라는 라디오방송을 위한 녹화를 학교 강당에서 하게 되었다. 녹화 전날, 형에게 내일 우리 학교에서 노래자랑 녹화를 하는데 나가서 노래를 부를 테니 방송하는 날에 꼭 들어보라고 자랑을 하였다.

녹화하는 날이 되자 들뜬 기분으로 한달음에 학교로 달려갔다. 선생님과 학생들이 모인 강당에서 사회자가 노래 부를 사람 손들라고 하였다. 진행 과정에서 지정된 몇몇 학생들이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나서기를 좋아했고 키도 작아서 맨 앞줄에 있었던 나는 지체 없이 손을 높이 들고 “저요, 저요” 목청껏 외쳤다. 그런 나를 알아본 것인지 지목하여 노래를 부르게 해 주었다.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아뿔싸. 사회자가 중간에 노래를 중단시킨 것이었다.

 

내가 박치 음치인지를 그때 알았다. 이날 이후 초등학교 졸업 전까지는 친구들 보기에 너무나 민망하고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시기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왜 그리 멀고 가기 싫었는지 모르겠다. 한껏 들떠서 미리 자랑을 하였건만 놀릴 형의 얼굴이 생각나서 울고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방송이 나오는 날에 예상대로 형은 나를 놀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방송을 들었는데 너의 노래는커녕 목소리도 안 나왔다고 놀리기에 나는 우겨 됐다.

노래도 불렀고 라디오에도 나왔다고 아픈 기억의 분풀이를 하듯이 끝까지 울고불고 큰소리치며 고집과 억지를 부렸다. 급기야 보골이 난 나는 밤늦게 나와서 형의 신발 한 짝을 이웃집 양철 지붕 위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히죽거리며 잠을 잤다.

 

다음 날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형이 학교 갈려니 신발 한 짝이 없어졌다고 난리가 난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새침을 떼고 천연덕스럽게 아무 말 없이 학교로 신바람 나게 달려가 버렸다.

신발 한 켤레가 다였던 시절이었기에 할 수 없이 형은 슬리퍼를 신고 갔는데 학교에서 벌도 받고 혼쭐이 났다고 한다.

통쾌한 하루였다. 학창시절 나의 첫 번째 소심한 복수는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형에게 말 못할 비밀이 있어서 그런지 그 일이 있고 난 후, 형의 말에는 거의 복종하게 되어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되어있었다.

졸업을 앞두고 앞으로 다녀야 할 중학교가 배정되는 추첨을 해야 했다.

집과 가까운 곳, 명문학교, 친한 친구들과 같은 학교에 배정되기를 희망하는 등의 이유로 가고픈 중학교가 저마다 있었다. 추첨이 정해진 전날 밤은 정월대보름이었다. 소원을 빌러 높은 데로 올라갔다.

보름달을 보고 소원을 빌면 들어준다는 어른들의 말에 형이 다니고 있는 중학교에 배정되기를 간절히 빌고 빌었다.

기적 같았다. 소원이 이루어 진 것이다. 이때부터 어른이 되기 전 한동안은 보름달이 뜨면 소원을 빌어보는 그런 습관이 생겨버렸다. 그 이후로는 보름달이 소원을 안 들어주는 것 같았다.

보름달

형과의 중학교 1년 생활이 3년을 편하게 다니게 해 주었다.

1970년대 남학생들만 다녔던 중, 고등학교에서는 힘 쎈 놈이 학교를 휘어잡았었다.

같은 반에 2년을 유급한 친구가 그 부류의 학생이었다. 학기 초 어느 날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장난을 치다가 그만 그 친구를 밀치게 되었다. 흥분한 그 친구가 무턱대고 휘두르는 주먹에 맞아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상당히 주먹이 매서웠다. 억울하고 분했다.

그 친구에게 얻어맞은 나는 곧장 3학년 형에게 달려가서 일러바쳤다. 형과 그 친구는 같은 나이면서 서로를 알고 있었다. 하굣길에 으슥한 곳에서 두 사람이 한바탕 붙었다.

태권도 유단자였던 형은 말 그대로 그 친구를 한방에 날려버렸다. 사이다 같은 통쾌한 순간이었다. 복수의 대상이 되었던 형이 나의 복수의 화신이 되어 또 한 번의 소심한 복수를 이루어줬던 것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형에게 지난날의 소심한 복수를 했었던 과오를 실토하고 잘못을 빌었다.

이상하게도 알고 있었는지 그냥 빙그레 웃으면서 나에게 떡뽁이를 사주었다. 가슴 속에 항상 자리 잡고 있었던 뭔가를 떨쳐버리는 듯 홀가분하게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이 일이 있은 이후 나는 태권도장에 다니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 친구랑 3년 동안 같은 반이 되었는데 나의 절친이 되고 지킴이가 되어 편안한 중학교 생활을 마무리 하게 되었다.

 

소심한 복수 전후로 나에게는 자그마한 변화가 왔다.

사회자가 청중을 웃게 하기 위하여 우스갯소리로 말한 “너는 다시는 노래 부르지 마아~”라는 말이 평생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 이후 모든 학창시절 음악시간에는 입모양만 따라하고 소리를 안내는 소심함으로 다가와 부르는 음악과는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다.

대리만족을 위해서 듣는 노래는 좋아해도 부르는 노래는 지금도 박치 음치이다. 때에 따라서는 가족들과 친구들과 직장생활에서도 노래방을 가보지 못했다는 것이 슬픔으로 다가와 아픔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혼자 차를 타고가면서 그때 불렀던 과수원 길을 완성해 보려고 흥얼거리면서 50여 년째 가다듬고 있다.

 

활달한 성격에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말과 행동이 앞서서 큰 코를 다친 이후에는 실천도 안 된 상태에서 먼저 말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결과가 나온 후에 말하도록 노력했다는 것이다. 모든 일에 생각도 하게 되고 신중을 기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중, 고등학교 담임선생님마다 어머니에게 웅이는 입이 무겁고 신중하다고 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해 주기도 하였다. 어쩌면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하면서 말 수가 적어진 산물이 아닐까도 싶다.

 

그리고 그 이후 학창 시절은 물론 지금까지 지인들과 싸움거리를 만들지 않도록 말과 행동에 최선을 다하고 사는 것 같다. 오늘도 소심한 복수를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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